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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야기

마포스캔들 인문학등산

 

 마포 스캔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자기 계발 대신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


 1. 겨울이 그리 길고 춥더니 다시 봄이다. 봄은 북한산 등산 인구가 늘어난 것만 봐도 확연하다. 지난 주말엔 꽤 쌀쌀했는데도 산에는 등산복을 입은 인파로 넘쳐났다. 근교의 산을 오르더라도 제대로 갖춰 입는 것, 예전과 다른 풍경이다. 언젠가 이후 북한산은 가히 등산복 패션의 경연장이라 할 만하다. 산에서 달라진 풍경이 하나 더 있다. 평일에 산을 오르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직장인이건, 은퇴나 실직한 이건 심신을 달래며 오를 산이 있다는 건 우리의 복이다. 문제는 앞으로 30년은 더 살아야 하는 이들이 긴 세월 산만 오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은퇴한 이들이 옛 친구들과 어울리며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는 것도 그렇다.
 박근혜 정부 출범을 전후해 기초노령연금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파생된 논란들도 많다. 복지공약 후퇴, 구멍난 사회 안전망, 국민연금 부실, 조세부담, 세대갈등 등등. 여기서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보다 근원적이고 엄중한 문제가 있다. 고령화다. 고령화를 둘러싼 예측들은 상상보다 훨씬 더 암울하다. 우리나라가 노인국으로 공식 등극하는 해는 2020년 즈음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65세 이상 노인들이 15세 미만의 어린이보다 많아진다. 인구도 하향세로 접어든다. 젊은이 4명이 노인 1명 이상을 부양해야 하는 것도 이 때부터다. 부양해야할 노인은 급속하게 늘어나는 대신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젊은이들은 허리가 휠 것이다.
 50세 이상이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도 이 즈음이다. 정치가 기득권화, 보수화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거다. 진보하는 세상에서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건 절망적인 일이다. 예상치도 못한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고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 은퇴자들이 몇 년 만 더 산을 오르면 닥칠 현실이다. 이에 대비해 자기 계발을 해도 모자랄 판에 공동체에 어울려 인문학 공부라니 말이 되는가.

 2. 지난 주 대안연구공동체의 책읽기 글쓰기 모임에서 재야 불교학자인 김윤수 변호사의 <불교는 무엇을 말하는가>와 <육조단경 읽기>를 읽었다. 앞서 그리스도교 책을 읽은 이 모임에서 불교 책으로 이 책을 선택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근본불교의 원리로 불교를 요연하게 설명한 책으로 이만한 책이 흔치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을 선정한 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저자가 재야 불교학자라는 사실이다.
김 변호사가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50세를 앞두고서였다.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도 <반야심경>, <금강경>, <육조단경> 등을 읽었으나 줄기조차 잡지 못했다. 몇 년이나 헤매던 그는 마침 번역되기 시작한 5부 니까야(초기불교 경전)를 읽으면서 비로소 불교의 윤곽을 잡는다. 알고 보니 <반야심경>과 같은 대승경전이 초기불교 경전을 전제로 쓴 경전이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알게 된 불교는 코끼리 다리 만지듯 알던 불교와 달랐다. 방대하면서도 정교했다. 그 뒤 그는 자신의 공부 결과를 책으로 써 낸다. 52세가 되던 2003년 처음으로 <육조단경 읽기>를 썼던 그는 <반야심경·금강경 읽기>, <주석 성유식론>, <불교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래장 경전 모음>,<설무구칭경, 유마경>, <묘법연화경>, <대방광불화엄경> 등을 해마다 쏟아냈다. 이 중 <대방광불화엄경>은 총7권, 6000쪽이 넘는 대작이다. 특급 학자도 쉽지 않은 엄청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법조인인 그가 불교 책을 쓴 것을 두고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자신의 원(願)과 삶을 조화시킨, 흔치 않은 사례임에 분명하다. 얼핏 보기에도 그의 공부는 단순한 공부가 아니다. 세상 변화를 향한 열정적인 노력이자 굳센 자기 수행이다. 공동체에서 그의 책을 읽은 보다 깊은 뜻은 삶과 공부의 조화를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인이 되는 공부를 우리도 본받기 위해서였다.

 3.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에 있는 칼 마르크스의 묘비명이다. 묘비명은 그의 철학 원칙과 삶의 자세를 드러내는 선언으로 읽히지만 작금의 철학자를 비판하는 경구로도 훌륭하다. 이들은 대체로 현실에 참여하는 대신 눈을 감은 채 세상을 해석하는 것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러나 긴 인류사를 목도한 우리는 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가는 꿈 또한 가능하지 않은 유토피아라는 것을.
 그럼에도 공부로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무엇보다 이들의 세계 해석이 해석에 그친 것만도 아니다. 철학을 포함한 광의의 인문학이 세상을 바꾼 사례는 고금에 흔하다. 이를 위해 피를 흘린 이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피 흘리며 언젠가 도달해야 할 목표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 기만과 억압과 폭력과 착취를 깨고 세대와 문화를 넘어, 협력하며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애쓰는 순간순간들의 모음이다. ‘지금, 여기서’의 일상이다. 경쟁 못지않게 협력과 나눔과 조화는 인간과 공동체의 본성 속에 스며있다. 우리가 어울려 공부하는 것도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현대에 적응하는 대신 우리가 지닌 본성을 구현하려 함이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 자기 계발서 아닌 인문학을 공부하는 뜻은 눈 감은 채 노예의 순응을 택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구성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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