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상민
정동 에세이 /도은 농부,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 저자
필자 제목: 봄과 고양이와 쥐와 나
쌀쌀한 바람 중에 봄기운이 만져진다. 참 추웠던 겨울이 뒷걸음질치고 봄의 전령들이 하나 둘 날아온다. 빛바랜 낙엽들 사이로 뾰족이 고개 내민 수선화 싹들, 통통히 물오른 매화 꽃봉오리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다가 뭔가 하기로 했다. 나도 두 팔 벌려 봄을 환영해야지. 우선 저장고를 정리하기로 했다.
겨우내 먹고 남은 것들이 들어있는 곳이다. 나락 포대들, 땅콩, 수수, 들깨며 참깨 포대, 감자, 양파, 시들어가는 무와 순무들도 보인다. 닭들에게 가끔 퍼주는 오래 묵은 쌀 포대를 열었다. 어라? 요건 뭐냐? 작은 생쥐 한 마리가 쌀바가지 속에서 빼꼼 올려다본다. 나도 놀라고 생쥐도 놀란다. 내 엄지손가락보다 더 작은 놈이다. 태어나서 처음 사람을 보았을 이 생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가지 안을 맴돈다.
“아니, 그러면 쥐들이 겨우내 여기서 새끼를 낳고 살았단 말이야?”
그동안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지나쳤더랬다. 먹을 것만 얼른 꺼내오고 말이다. 이제야 여기저기 살펴본다. 아니나 다를까 벽에 쥐구멍이 나있고, 쌀 포대며 들깨포대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 게다가 감자까지 갉아먹은 게 보인다. 으윽, 우리 양식을 축내다니 참을 수 없도다! 이놈의 쥐새끼들, 내 너희들을 가만 두지 않으리! 나는 씩씩대며 분노하고, 바가지 안의 생쥐는 더욱 놀라 찍찍댄다. 흠, 요걸 어쩐다?
마음 같아선 확 잡아채서 패대기를 치거나 고양이에게 던져주고 싶다. 시골에서 알량하게나마 농사를 짓고 살다보면 별수 없이 쥐들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 쥐들은 늘 우리 양식을 넘보고, 우리는 어떻게든 뺏기지 않으려고 별별 수단을 궁리한다. 쥐덫을 놓고, 끈끈이를 펼쳐놓고, 가끔은 쥐약도 놓아보고, 고양이를 키운다. 죽은 쥐의 꼬리를 들고 거름더미에 내다버린 게 어디 한 두 번이던가.
우리 고양이는 대체 어디 갔는지? 그나저나 이 생쥐 녀석, 잠시 놀람이 가라앉았는지 맴돌다 멈춰서 나를 바라본다. 나도 녀석을 마주 바라본다. 밤처럼 까만 눈이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모든 새끼들이 사랑스럽듯 이 생쥐도 참 귀엽다. 아무리 내가 십 수 년 동안 쥐들과 용맹스레 싸워온 여전사(!)라지만, 얘는 어려도 너무 어리다. 별수 없이 바가지를 조심스레 들어서 마당 구석에 풀어주었다. “너, 저장고 근처에 오면 절대 안 된다!” 점잖게 타이르기까지 하면서.
이삼 년 전에는 작은 아이가 생쥐 세 마리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봄이었던가. 쓰다만 털실을 봉지에 넣어 창고 벽에 걸어두었다가 어느 봄날 열어보았는데, 거기에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아기 생쥐 세 마리가 들어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아직 눈도 못 떴고 털도 안 나서 분홍빛 보드라운 살갗을 가진 놈들이었다. 아이는 “아우, 너무 가엽다. 그리고 참 귀여워.” 어쩌고 하더니 자기가 키우겠단다. 도대체 말이 안 된다고, 쥐는 우리의 적이라고, 게다가 우리 집 고양이들이 잡수실 거라고 내가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소용없었다.
“방에다 잠시만 키울게, 조금 커서 눈을 뜨면 밖에다 풀어줄 거야. 그때까지만 제발 봐줘요.”
딸아이는 투명하고 동그란 플라스틱 통에다 헝겊과 털실을 두툼히 깔고 생쥐를 넣은 다음 따스하게 덮어주었다. 입을 벌리고 우유도 먹였다. 밤에는 우리 머리맡에다 두었다. 어휴, 미래의 도적들을 키우다니 말도 안 돼. 나는 궁시렁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잠결에 머리맡 생쥐들이 몇 번 찍찍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마다 딸아이는 “응? 왜 그래? 배고파?” 자기가 생쥐 엄마라도 된 듯이 들여다보곤 했다. 며칠 밤을 우리와 동침한 이 생쥐들은 따스한 어느 봄날 자유를 얻어 나갔다.
그건 그렇고, 우선 저장고를 정리해야지.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가져다가 임시로 쥐구멍을 막고, 쥐들이 쏠아놓은 곡식들을 다른 포대에 담고, 갉아먹은 감자를 도려낸다고 한나절이 다 갔다.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고양이가 그때서야 어슬렁거리며 저장고 근처에 나타나셨다. 저도 쥐 냄새를 맡았는지 여기저기 날렵하게 올라 다니며 고양이 폼을 잡는다. 하지만 곧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더니 졸기 시작한다. 아주 게으르게 낮잠을 주무신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이장희 시인은 그렇게 노래했다지만, 웬걸 얘는 꽃가루는커녕 온통 재투성이 검댕 고양이다. 매섭던 겨울밤들을 불 때는 아궁이 곁에 딱 붙어서 지낸 탓이다. 봄비 내리면 싸돌아다니다가 저절로 씻어지겠지 뭐. 고양이 목욕시키기 같은 일엔 전혀 관심 없는 나는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도는” 고양이의 나른함에 도리어 눈을 흘긴다.
“쥐들이 이리 난리치며 우리 양식을 먹어댔는데, 넌 대체 뭐하는 얘냐? 너도 한 식구로서 밥값이란 것을 해야 하지 않겠냐?”
따스한 햇살에 가르랑거리며 꿈나라를 헤매는 고양이 곁에 나도 퍼질러 앉는다. 그리고 열심히 궁리를 한다. 어떻게 이 쥐들을 잡지? 고양이를 저장고 안에 넣어두고 밤새 문을 꽉 닫아 둬? 다음 장날에 쥐 끈끈이를 사와야겠지? 저장고 안에 있는 곡식들을 다 들어내고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펼쳐야 하나? 쥐구멍들은 빨리 시멘트로 막아야만 해!
달콤한 봄이 오고 있는데,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어노는데” 나는 턱을 괴고 앉아서 오로지 쥐 잡을 생각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