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2월 12일 대한제국의 정치가, 친일파, 매국노의 대표 이완용이 죽은 날이다.
그는 1905년 러일 전쟁에 일본의 승리가 결정되자, 친일파로 변신해 어전회의에서 고종을 협박해 을사늑약을 맺게 했다. 그 대가로 조선귀족 백작 작위, 내각총리대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1909년 12월 22일에 이재명이 칼로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완용은 칼에 왼쪽 폐가 관통했지만, 일본인 의사가 최신 의료기술을 총동원해 약 2개월 동안 치료해 살려내었다. 그러나 폐병을 얻어 계속 고생하였다. 그 후도 이완용은 조선에서 왕 다음 부자라는 소문까지 나며 재산을 늘려가며 잘 살다가 69세 장수하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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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부터 이완용 후손들은 캐나다로 이민 간 장손 주 이윤형을 대표로 조상 땅 찾기 소송을 시작하였다. 그 후 몇 개는 폐소하였고, 1998년 서대문구 북아현동 토지 반환청구 소송에 승소하여 약 30억 원의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아직도 그 후예들이 친일 환수재산 반환 소송을 벌리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는 그가 있었기에 나라는 없어졌지만, 왕실의 명맥만은 유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본에 대한 외교적 대응 덕분에 왕족들이 멸문을 당하지 않고 일본에 귀손 한다는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가 없이 왕실만 살아남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다.